(스포주의)비밀 - 평범한 일본의 신파소설? 소설 - 추리 / 미스터리

*주의 : 소설, 영화, 드라마 비밀의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비밀(히가시노 게이고)


저는 일본소설 작가 중 기시 유스케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 그 다음으로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님을 좋아합니다. 이 셋의 공통점은 우선 소설의 가독성이 좋고, 또 재미가 있다는 점이죠. 이분들의 소설은 하루안에 다 읽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는 이 '비밀'의 경우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데에 한 세시간 정도 걸렸다고 기억합니다. 다른 분들이 '그렇게나 오래 걸렸어?!'라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저는 집중력이 매우 떨어집니다. 그런 제가 한 자리에서 세 시간동안 꼼짝않고 소설을 읽었다는 건 분명 대단한 일입니다.

소설의 줄거리, 간단히 요약하자면 "죽은 엄마의 영혼이 딸의 몸에 들어가버렸다." 정도가 되겠네요. 스기타 집안의 모녀가 버스 타다가 사고를 당합니다. 이 때 어머니인 '나오코'는 죽었고 딸 '모나미'의 몸은 살았습니다. 근데 딸이 눈을 떠보니 웬걸? '모나미'는 모나미가 아니었습니다.

모나미가 아니면 뭘까요. 모나미 볼펜인줄 샀는데 알고보니 무나미 볼펜이라던가 하는 걸까요? 별로 웃기지도 않는 드립은 집어 치우겠습니다.

딸 모나미의 몸에서 눈을 뜬 건 '모나미'가 아닌 '나오코', 즉 나오코가 모나미의 몸으로 살아난 겁니다. 스기타 집안의 가장 '헤이스케'는 혼란스러웠죠. 나오코가 산 것인지, 모나미가 산 것인지. 나오코의 영혼을 가진 모나미의 몸에 그는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못했습니다. 이후 나오코는 모나미에게 몸을 돌려줄 방법을 찾기 위해 열심히 공부합니다. 헤이스케도 동의하고, 모나미의 영혼에 나오코가 있다는 것은 둘 만의 '비밀'로 여기기로 하죠.

이후 둘의 삶은 순탄하면서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나오코는 열심히 공부해 의대까지 갑니다. 하지만 집에서는 아내 나오코로, 밖에서는 딸 모나미로 사는 이중생활을 하며 그녀에게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오기도 했죠. 남편 헤이스케도 마찬가지로 밖에서는 홀아비로, 안에서는 딸을 잃은 남편의 이중생활을 합니다. 바깥에서 그에게 구애하는 여성을 저버릴 수밖에 없고, 안에서는 딸의 몸을 가진 아내와 관계를 갖지 못해 '부부'라는 관계가 희미해져 갑니다.

나오코는 모나미의 삶에 점점 심취해갑니다. 모나미의 삶이 길어지고, 다른 남성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도 하죠. 헤이스케는 그런 나오코를 의심하기도 하고, 질투하기도 합니다. 나오코는 그런 헤이스케를 점차 싫어하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호감을 가진 대학생과 만나려 했고, 헤이스케는 그 둘의 만남에 끼어들어 훼방을 놓습니다.

이 두 명은 서로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두 역할의 어느 쪽에서도 뚜렷할 수 없었죠. 헤이스케의 질투는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로서의 정체성과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으로서의 정체성, 그 사이의 정체성에서 질투하는 것으로도 보였고, 두 역할에서 비롯되는 두 가지 형태의 질투로도 보였습니다. 나오코 또한 아내로서 거절하는 것과 한 명의 여대생으로서 남학생과 교제하는 것, 어느 쪽에서도 뚜렷하게 답을 내놓지 못했죠. 만약 그녀가 확고하게 아내로서 있었다면 거절을 했을 것입니다. 허나 이 시점에서 나오코는 나오코이자 모나미이기도 했습니다.

소설은 헤이스케의 입장에서 서술됩니다. 당연히 헤이스케의 갈등이 나타나죠. '그녀'를 아내로서도 딸로서도 사랑하지 못하는 그의 갈등이 그를 괴롭게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나오코의 몸에서 모나미의 영혼이 떠오른 것이죠. 모나미의 몸은 그 날을 기점으로 모나미와 나오코가 공유하기 시작합니다. 헤이스케의 갈등이 단번에 해결됐습니다. 나오코와 모나미가 분리되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야 할 필요가 사라진 것입니다. 이제 그는 다시 행복한 가정을 되찾았습니다. 아내와 딸 어느 쪽도 잃지 않은 것으로 보였죠.

그리고 모나미의 몸을 모나미의 영혼이 차지하는 시간이 점차 길어졌고, 나오코의 영혼이 나타나는 시간은 점차 짧아졌습니다. 나오코는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헤이스케에게 고백하고, 헤이스케는 연인 시절 그들의 추억이 있던 데이트 장소로 가서 이별을 준비합니다. 연인시절을 보낸 그곳에서, 나오코는 모나미의 입을 빌려 헤이스케에게 작별합니다. 그 후 나오코의 영혼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모나미는 나오코의 노력으로 들어간 의대에서 졸업하고, 뇌의학 의사가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모나미의 몸에 나오코가 들어가게 된 원인인 교통 사고 당시 버스 기사의 아들을 만나 결혼하게 됩니다.

사실 비밀이 여기서 끝났으면 평범한 일본의 신파극이 되었을 것입니다. 영화화가 되고서, 드라마화로 다시 한번 재탄생하진 않았을 겁니다. 비밀에는 가장 충격적인 '비밀'이 있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럽니다. 여태까지 쭉 스포해놓고 뭔 개소리냐라고 묻는다면 스미마셍. 적어도 지금 제가 얘기할 스포일러에 비하면 앞의 얘기는 스포일러 축에도 못들어갑니다.

특별히 한 줄 더 띄우겠습니다.

사실 나오코의 영혼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모나미의 영혼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딸은 나오코에게 영혼을 빼앗긴 이후 한 번도 돌아오지 못 했고, 나오코는 결국 모나미의 행세를 하면서 의사가 되고 버스기사의 아들과 결혼합니다.

이 결말이 충격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사람도 있을겁니다. 이게 왜 충격적인가, 그건 이 소설의 내용 때문입니다. 소설 - 비밀은 철저하게 헤이스케 중심으로 서술됩니다. 앞서 전 나오코도 헤이스케처럼 정체성의 갈등을 느꼈으리라 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 추측입니다. 헤이스케의 갈등, 헤이스케의 괴로움은 나와도 나오코는 어떤 인물인지 소설에서 명확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또한 소설의 문체는 건조하고 차갑습니다. 아름다운 사랑을 논하기에는 묘사도 부드럽지 않죠.

나오코가 무슨 생각으로 살아왔고, 나오코가 어떤 인물인지 독자와 헤이스케는 추측할 수 밖에 없죠. 나오코가 부득이하게, 정말 고심하며 헤이스케를 저버린 것일 수도 있고, 예쁘고 젊은 의사인 모나미로서 새출발을 하기 위해 헤이스케를 속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혼란스러워하고 집착하며, 괴로워하는 헤이스케를 더이상 볼 수 없었던, 그를 사랑하는 여자로서 최선을 다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오코는 자기 스스로를 죽임으로 남편이 자신처럼 새 삶을 살길 바란 것일 수도 있습니다.

헤이스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그는 아내가 사실 아직도 살아있고, 딸의 몸으로 다른 남자와 결혼하려 한다는 것을 결혼식날 눈치챘습니다. 그 결혼 상대는 비록 용서하였지만 사건의 원흉이었던 버스 기사의 혈육이죠. 그는 결국 기사의 아들이자 사위가 될 사내에게 주먹질을 합니다. 이 펀치를 체념으로 볼지, 분노로 볼지는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어느 쪽이든 비참하군요. 그는 이제 자유가 되었습니다. 딸과 아내를 모두 한 사내에게 빼앗겼으니요. 그러나 그 새 삶은 나오코와 달리 외로워 보이네요. 이제 그의 곁에 누가 있나요.

모나미는 결국 죽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몸을 빼앗겼죠. 어쩌면 그녀의 영혼은 나오코의 몸 속에 들어가 함께 죽지 않았을까요. '아빠와 딸의 7일 간의'라는 소설이비참하게 끝났다면 이랬을지도 모르겠군요.

감동을 느끼고 싶다면 나오코와 이별하는 장면까지였습니다. 거기까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감동적인 소설이었죠. 전 이 시점에서 끝날 줄 알았습니다. 작가가 그런 흉기를 뒤에 숨기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나요. 허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소설이 거기서 끝났으면 그저 그런 소설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훅 하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흉기는 분명 독자에게 깊은 인상(빡침)을 주었습니다.

나오코가 선택한 결말, 그로 인해 누가 행복할까요.

모나미는 뒤져버렸습니다. 나오코가 선택한 새 남자의 아버지가 일으킨 사건 때문이었죠. 그 또한 피해자였지만 모나미가 살아 돌아온다면 개소리 지껄이지 말라 그러겠죠. 저라면 그럴 꺼 같네요.

헤이스케는 늙었습니다. 이제 젊은 시절은 갔죠. 아내를 위해 딸을 위해, 그리고 가족을 위해 헌신하던 그는 지쳤습니다. 그는 자유가 되었지만, 동시에 고독해졌습니다. 진상을 알아버린 그는 딸의 가죽을 뒤집어 쓴 아내를 바라볼 수 없겠죠. 새 삶을 시작하기에는 너무 늙어버렸죠. 설령 나오코가 그의 새 삶을 바란 의미에서 떠났을지라도, 그는 그럴 힘이 없습니다.

나오코는 모릅니다. 누구도 그녀의 내막을 알 수 없죠. 드라마나 영화에선 어느정도 나온다는데, 전 안 봤습니다. 일본 영화나 드라마는 좀 오글거리더라고요. 또 이 기막힌 내용을 두 번 세 번 볼 용기가 없습니다.

분명 소설은 재밌습니다. 집중력 없는 제가 단숨에 읽었으니까요. 단숨에 읽었기에 충격은 배가 되었습니다. 한창 몰입하고 있었기에 괴로웠죠. 제가 괴로운 건 아마 헤이스케에게 몰입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일단 남자고, 소설은 헤이스케 중심으로 진행되니까요. 성욕을 해소하는 것에 갈등하고, 성매매를 통해 해소하려 해도 나오코에 대한 배신으로 여겨져 차마 세우질 못하는 헤이스케......

여러분은 나오코가 어떤 인물일 것 같나요? 악녀일까요? 어머니일까요? 아니면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일까요? 아니면 기묘한 일에 휘말린 피해자에 불과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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